필름 사진가들 사이에 오래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ISO 800 이하 필름은 기내 검색대를 통과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공항 검색대가 모두 예전 X선 장비이던 시절에 생긴 말이다. 그런데 공항마다 CT 검색기가 들어서면서 필름 제조사들이 안내 문구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는 감도를 따지기 전에 두 가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내가 지나갈 검색대가 어떤 장비인지, 그리고 가방 속 필름이 아직 현상 전인지.
CT도 X선이다
미국 교통보안청(TSA)의 설명을 빌리면, 기내 수하물용 CT는 X선으로 가방 속을 3차원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 주는 장비다. 검색 요원은 이 영상을 화면에서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핀다. 예전 검색기는 평면 영상만 보여 줬다. 흔히 X선 검색기와 CT를 다른 장비처럼 부르지만, X선을 쓰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예전 평면 검색기를 「기존 X선 장비」, 새로 들어온 3차원 검색기를 「CT」라고 부른다.
제조사들은 뭐라고 하나
일포드(ILFORD) 필름을 만드는 하만(HARMAN)은 기술 FAQ에서, 새 기내 CT는 감도와 상관없이 자사 ILFORD·KENTMERE 필름에 안전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초기 시험 결과를 근거로 들었고, 시험을 더 해 보고 내용을 고치겠다고 덧붙였다. 기존 X선 장비는 따로 다뤘는데, DELTA 3200만큼은 이 경우에도 손검사를 요청하라고 권한다. 손검사를 해 주는지는 공항과 나라마다 다르다는 말도 적어 두었다.
코닥(Kodak)은 영화용 필름 고객에게 낸 운송 안내(2023년 6월 갱신)에서 새 기내 CT가 현상 전 필름에 포깅을 일으킨다고 경고한다. 아직 찍지 않은 필름이든 다 찍은 필름이든, 현상 전이라면 똑같다는 입장이다. 두 회사 모두 현상 전 필름은 부치는 짐에 넣지 말라고 한다. 위탁수하물 검색이 기내 검색보다 세기 때문이다.
다만 두 안내가 다루는 범위는 다르다. 코닥 문서는 영화용 필름을 두고 쓴 것이고 하만의 판단은 자사 제품에 한한다. 얼마나 손상되는지, 몇 번 통과하면 눈에 띄는지 알려 주는 수치는 어느 쪽에도 없다. ISO 100이나 400이라면 CT를 통과해도 괜찮다는 말도 찾을 수 없었다.
코닥의 필름 보관 안내에는 X선의 영향이 쌓인다는 설명도 있다. 출국, 환승, 귀국 때마다 검색대를 거치면 포그와 입자가 조금씩 늘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예전 저선량 기내 검색기를 기준으로 쓴 대목이라, 새 CT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렵다.
코닥 운송 안내에 딸린 그림이다. 장비 이름만 있을 뿐 모델, 선량, 통과 횟수, 시험 날짜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니 이 그림을 요즘 기내 CT를 한 번 통과한 결과처럼 소개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현상 전이냐, 후냐
아직 찍지 않은 필름은 CT와 강한 X선을 피해야 한다. 포장을 뜯지 않은 새 필름이든, 필름 통에 든 것이든, 카메라에 넣어 둔 것이든 다르지 않다.
마지막 컷까지 찍고 감아 둔 필름도 마찬가지다. 다 찍었더라도 현상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빛과 X선에 반응하는 상태다.
현상까지 마친 네거티브와 슬라이드는 사정이 다르다. 코닥은 현상이 끝난 필름은 더 이상 빛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여행지에서 현상한 뒤 비행기에 싣는 방법을 대안으로 든다. 물론 열이나 습기, 긁힘은 또 다른 문제다.
완성된 인화물은 이번에 살펴본 공식 문서에서 공항 CT와 연결한 언급을 찾지 못했다. 현상 전 인화지나 즉석필름은 인화물과 성질이 다른 재료이니, 제품마다 안내를 따로 확인해야 한다.
손검사는 어디까지나 부탁
TSA는 현상 전 필름과 필름이 든 카메라는 기내에 들고 타거나, 검색대에서 손검사를 요청하라고 권한다. 같은 페이지의 반입 물품 표에는 필름이 기내와 위탁 모두 「반입 가능」으로 표시돼 있다. 하지만 가지고 탈 수 있다는 것과 필름이 무사하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반입 여부는 현장 직원이 최종 판단한다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다.
코닥 역시 현지 직원이 손검사 요청을 거절할 수 있다고 적었다. 미국 기관의 권고가 다른 나라 공항에서도 통하는 것은 아니다. 런던 히드로 공항은 공항마다 보안 장비와 규정이 다르니, 다른 공항에서 출발할 때는 그 공항의 안내를 확인하라고 한다. 편집부가 확인한 히드로 FAQ에도 필름 손검사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한국 공항에서 손검사를 받은 한 사례
그렇다면 인천과 김포는 어떨까? 인천국제공항의 제한물품 FAQ와 김포국제공항의 보안검색 안내에서는 필름 손검사를 다룬 내용을 찾지 못했다. 공식 안내가 비어 있는 자리를 지금은 사용자들의 경험담이 채우고 있다. 한 필름 사용자가 2025년 12월에 손검사를 신청한 과정을 온라인에 자세히 정리해 두었다. 디시인사이드 필름카메라 갤러리와 네이버 블로그 글을 참고해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편집부가 그 내용을 짧게 간추렸다.
글쓴이에 따르면 한국 공항의 기준은 ISO 400이다. ISO 400 이상 필름은 요청하면 손으로 검사해 주지만, 그보다 감도가 낮은 필름은 특별보안검색 공문이 있어야 손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글쓴이는 이를 공항 매뉴얼이라고 소개했지만, 편집부가 공식 공지로 확인한 기준은 아니다.
글쓴이가 정리한 순서는 이렇다. 먼저 국토교통부 누리집에서 「특별 보안검색 물품 허가 신청서」(별지 제1호 서식)를 내려받아 작성한다. 서식에는 처리기간이 3일로 적혀 있다. 신청서에는 ISO 400 미만 필름만 이름, 포맷, 감도, 수량까지 적는다. ISO 400 이상 필름은 넣지 말라는 것이 글쓴이의 조언이다. 신청은 정부 전자문서 서비스인 문서24에서, 출발 공항을 관할하는 지방항공청 보안과로 보낸다. 인천과 김포는 서울지방항공청 관할이다. 코닥 안내문 같은 근거 자료를 PDF로 첨부하고, 회신 공문이 오면 종이로 출력해 둔다. 공항에서는 종류별로 지퍼백에 나눠 담은 필름과 공문을 함께 검색 요원에게 건네면 된다.
글쓴이의 공문에는 근거 조항으로 항공보안법 시행령 제13조 제3항 제4호의2와 제5호가 적혀 있다. 예시로 보여 준 신청서는 김포에서 제주로 가는 국내선이었다. 글쓴이가 직접 확인했다는 장비 현황도 있다. 2025년 12월 기준으로 인천공항은 1·2터미널 검색대 대부분이 CT로 바뀌었고, 김포와 제주는 아직 예전 X선 장비였다고 한다.
편집부는 글쓴이가 링크한 국토교통부 서식 페이지와 항공보안법 시행령 원문을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서식 이름, 조항 번호, ISO 400 기준, 터미널별 장비 현황은 모두 글쓴이의 설명이다. 공문이 있어도 마지막 판단은 현장 직원에게 남는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요청만 하면 손검사를 해 준다는 ISO 400 이상 필름이라고 해서 CT를 통과해도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 본 대로 코닥과 하만은 CT에는 감도 기준을 따로 두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챙길 것
아래는 편집부의 제안이다. 어느 공항에서나 손검사를 받게 해 주는 방법은 아니다.
- 출국, 환승, 귀국 공항마다 공식 안내를 미리 찾아본다. 미리 답변을 받았더라도 현장에서 그대로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 국내 공항에서 ISO 400 미만 필름을 가지고 탄다면, 위 사례의 공문 신청을 미리 알아본다. 서식에 적힌 처리기간을 생각해 넉넉히 준비한다.
- 필름과 필름이 든 카메라는 바로 꺼낼 수 있는 곳에 넣어 둔다. 코닥은 투명하고 여닫을 수 있는 봉투를 권한다.
- 검색대에 올리기 전에 현상 전 필름이라고 말하고 손검사가 되는지 묻는다. 안 된다고 하면 직원의 안내를 따른다.
- 현상 전 필름은 부치는 짐에 넣지 않는다.
- 손검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여행이라면 필름을 현지에서 사서 쓰고, 돌아오기 전에 현지에서 현상하는 방법도 있다. 코닥이 안내한 대안이다.
납 차단 파우치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로모그래피 한국어 안내에는 차단 파우치 판매 링크와 보호 효과 설명이 함께 실려 있다. 하지만 CT 앞에서 얼마나 막아 주는지 따로 검증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손검사를 대신할 방법으로 권하지는 않는다.
감도는 여전히 따져 볼 만한 숫자다. 다만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 검색대는 어떤 장비인가, 그리고 이 필름은 아직 현상 전인가.